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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힌토끼 | 2018/01/12 02:19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1)
행복한 아침 독서: 선



『선』
이수지 지음 / 40쪽 / 15,000원 / 비룡소


예전 싱가포르에 살 때, 한국에 잠시 들를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실내 스케이트장에 가곤 했어요. 일 년 내내 더운 나라에서 살다 보니 아이들은 눈이나 얼음을 보면 입이 귀에 걸렸지요. 아이들 따라 오랜만에 얼음 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금방 적응해 자연스럽게 얼음 위를 달리게 되더군요. ‘몸이 기억하는구나, 이 모든 것을…’ 하고 생각하는 순간, 어렸을 적 얼음 위에서 친구들과 지칠 때까지 놀던 기억으로 휘익 돌아갔어요.


어릴 적, 집 앞에 가장 큰 논은 겨울이면 물을 대어 얼린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곤 했어요.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들었지요. 저는 특히나 스케이트를 좋아해 아침 개장 시간에 가서 어스름 저녁 주인아저씨가 “제발 좀 가라!” 할 때까지 얼음을 지쳤었지요. 지쳐 쓰러질 정도로 놀았던 기억, 기분 좋은 노곤함 같은 것들이 제 몸과 마음에 새겨져 무엇을 하든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기억이 새겨질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코끝 찡한 겨울 아침 얼음판 위에 서면, 고르지 않지만 깨끗한 그 표면에 첫 선을 그을 기대에 절로 가슴이 뛰었지요. ‘사가각’ 내 스케이트 신발의 톱니가 경쾌하게 얼음을 긁는 소리, 차가운 얼음 위에 쏟아지는 따뜻한 겨울 햇볕, 속도를 내면 느껴지는 바람, 등줄기를 흐르는 땀, 얼음 위에 새겨지는 나의 궤적…. 이것들이 『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얇은 금속조각 하나에 의지해 나름 균형을 잡으며 가는 제 아이들의 뒤를 쫓아가며 아이들이 그리는 선을 보았습니다. ‘얼음판 위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드로잉이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스케이트장에 어떤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이제 나가서 좀 쉬라고 알려주는 소리였지요.
아이들이 마지못해 나가고 나면, 몸집도 우람한 잠보니(정빙기)가 스케이트장으로 들어옵니다. 잠보니는 아이스링크의 얼음 표면을 갈아내고, 갈아낸 얼음 조각들을 수거하고, 표면을 닦아내면서 물을 뿌려 아주 얇은 막을 형성합니다. 이 거대한 놈이 한 번 지나가면 그곳은 반짝반짝 새로운 얼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이 위 연필의 흔적을 한 번에 지워내는 성능 좋은 지우개 같았지요. ‘지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만큼이나 가슴 뛰는 일입니다.

내가 그리는 선, 그림, 실수, 좌절, 지워내기, 다시 그리기,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들이 모든 창작 행위와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담아내보고 싶었습니다. 『선』에서는 언뜻 보면 연관 없는 두 세계가 함께 굴러가지요.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모른 척 평행으로 달리다가 어느 순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요. 그림책은 그런 서로 다른 세계를 동시에 담아내기 좋은 매체입니다.
책 표지에도 두 가지 세계가 함께 있어요. 표지의 반쪽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반질반질하게 코팅되어 있고 그 위에서 빨간 모자 아이가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어요. 나머지 반쪽은 오돌토돌 질감 있는 도화지이고, 한쪽 구석에 삐죽하게 연필이 보여요. 그림책은 물건이고, 그 물건이 주는 촉감도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제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책 안에서 어떤 완결된 세계를 내 마음대로 짓고 부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림으로만 말이에요. 글 없는 그림책은 그림의 힘으로 밀고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한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일반적인 그림책에서 글은 순서를 정해주고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글이 없다면 독자는 그림의 디테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겠지요. 한마디로, 뭘 봐야 할지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시각적 요소로 활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그림의 디테일, 리듬과 분위기 그뿐만 아니라 책의 판형, 크기, 종이의 질감, 책의 무게 따위도 저마다 목소리를 내지요. 그림책은 총체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갑니다. 글이 콕 집어 이야기해주지 않으므로 이야기의 과정도 결론도 독자가 낼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서 멋진 회전 도약을 시도하던 아이는 한쪽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구겨진 종이는 아이의 마음이겠지요. 어떤 독자는 책 전체에서 아이의 실수와 좌절을 봅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요. 어떤 독자는 창작의 과정에서 늘 있는 고난의 순간보다는 그저 종이가 얼음판이 되고, 스케이트 선이 연필 선이 되고, 얼음판 위의 환상이 구겨져 버리는 반전의 지점을 봅니다.

우리는 모두 내 안의 이야기를 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봅니다. 한 어린 독자는 색색의 모자를 쓴 아이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장면을 보며 “색연필들이 등장했다!”고 했다는군요. 그림책은 근사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근사한 물건입니다.


이수지 작가는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림책을 펴냈습니다.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지은 책으로 『선』 『거울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등이 있습니다.



/ 2018-01-01 10:52


by 힌토끼 | 2018/01/09 02:20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0)
한국일보: [그림책, 세상을 그리다]--<선>

[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넘어짐으로써 그 시간들을 기억해 냈다면


곡절 끝에 수능이 끝났다. 지난 두어 주 난리라도 치른 듯하다. 올해엔 실제 난리가 났으니 더 그럴 만하나, 아이들의 열두 해가 오직 대입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양 해마다 소란스레 몰아가고 몰려가는 분위기는 씁쓸하기만 하다.

소란의 끄트머리에 그림책 한 권 집어 든다.

스케이트를 신은 소녀가 빙판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표지를 넘기면, 면지 위에 종이 한 장 펼쳐져 있고, 곱게 깎은 연필과 지우개 놓여 있다. 다음 장에 소녀가 다시 등장하자 흰 종이는 번듯한 아이스링크가 된다. 사뿐히 지쳐 나아가니, 궤적은 선이 되어 그림을 남긴다. 빙판을 달리는 소녀, 백지를 달리는 선. 오랫동안 기량을 닦은 듯 소녀가 그리는 그림은 날렵하고 매끄럽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나선이 높고 낮은 음자리표로 변하더니, 지그재그로 리듬을 자아내다가 돌연 곧게 나아간다. 팽그르르 제자리를 돌다가, 어느새 동심원을 빠져 나와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는 듯 뛰어오르는 소녀, 솟구쳐 오르는 선! 공중에서 네 바퀴 반을 돌고 빙판 위로 내려앉는데, 아뿔싸! 중심을 잃어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그림 한 장 멋지게 그려내고 싶었던 열망이 깨진 탓일까. 소녀는 그리던 그림을 마구 구겨 버렸다. 구겨진 열망의 언저리에 흩어진 지우개가루와 닳은 연필이 쓸쓸하다. 거기까지인가?

‘아니!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책장을 넘기니 구겨 뭉쳤던 그림이 다시 펴져 있다. 소녀가 구김자국 남아 있는 빙판을 돌아보는데, 소년 하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니, 하나가 아니다. 둘, 셋, 넷, 다섯... 소년과 소녀들이 넘어져서도 웃고 있다. 순간, 시간이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시절의 노천 얼음판, 거기 작은 소녀와 소년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다. 잘 타건 못 타건 그저 얼음을 지치는 것이 즐거웠던 아이들. 투박한 빙판 위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넘어졌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이 엉덩이를 털며 다시 일어났던가. 일어나 친구를 일으켜 세워 주고 어린 아우 손잡아 끌어 주며, 얼마나 신나게 깔깔댔던가. 친구의 허리를 붙잡고 다 함께 달려가던 기차놀이는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래, 그 시간들이 나를 이만큼 자라게 했지.’ 그랬으니 소녀는 링크에 올라 제 나름의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을 게다. 결정적 순간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넘어짐으로써 그 시간들을 기억해 냈다면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비로소 마지막 장을 넘긴다. 뒷면지 위에 여러 장 그림이 포개져 있다. 어느새 연필은 짧아져 있고 지우개도 반쯤 닳았는데, 맨 윗장에 그려진 숲속의 얼음판이 소담하다. 소녀가 다시 일어나 그려 낸 것일까? 곧 성년이 될 소녀는 그 순수의 얼음판을, 예전처럼 그저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더불어 달리고 싶은 걸까? 그리 되길 바라며 책장을 덮는다.

다시 스산한 현실, 내 아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빙판에 넘어져 의기소침해 있다. 그리던 그림을 구겨 내던진 아이들도 있을 터. 하지만 넘어진 김에 잠시 누워 숨을 고르고, 구겨버린 그림을 다시 펼쳐 찬찬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하여, 링크 위의 경연은 삶의 일부일 뿐이며 인생에는 고난도 점프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진실을 발견해 준다면 고맙기 그지없겠다.

어른으로서 아이들 사는 세상 조금도 낫게 해 주지 못한 주제에, 넘어진 아이들에게 꼰대스런 당부만 늘어놓고 맺으려니 미안하다. 하물며, 넘어져 볼 기회조차 빼앗긴 세월호와 구의역과 제주 어느 공장의 아이들에게야 면목 없는 심정 어찌 말로 다하랴.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출판인



by 힌토끼 | 2017/12/08 10:40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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