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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아침 독서: 선



『선』
이수지 지음 / 40쪽 / 15,000원 / 비룡소


예전 싱가포르에 살 때, 한국에 잠시 들를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실내 스케이트장에 가곤 했어요. 일 년 내내 더운 나라에서 살다 보니 아이들은 눈이나 얼음을 보면 입이 귀에 걸렸지요. 아이들 따라 오랜만에 얼음 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금방 적응해 자연스럽게 얼음 위를 달리게 되더군요. ‘몸이 기억하는구나, 이 모든 것을…’ 하고 생각하는 순간, 어렸을 적 얼음 위에서 친구들과 지칠 때까지 놀던 기억으로 휘익 돌아갔어요.


어릴 적, 집 앞에 가장 큰 논은 겨울이면 물을 대어 얼린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곤 했어요.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모여들었지요. 저는 특히나 스케이트를 좋아해 아침 개장 시간에 가서 어스름 저녁 주인아저씨가 “제발 좀 가라!” 할 때까지 얼음을 지쳤었지요. 지쳐 쓰러질 정도로 놀았던 기억, 기분 좋은 노곤함 같은 것들이 제 몸과 마음에 새겨져 무엇을 하든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기억이 새겨질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코끝 찡한 겨울 아침 얼음판 위에 서면, 고르지 않지만 깨끗한 그 표면에 첫 선을 그을 기대에 절로 가슴이 뛰었지요. ‘사가각’ 내 스케이트 신발의 톱니가 경쾌하게 얼음을 긁는 소리, 차가운 얼음 위에 쏟아지는 따뜻한 겨울 햇볕, 속도를 내면 느껴지는 바람, 등줄기를 흐르는 땀, 얼음 위에 새겨지는 나의 궤적…. 이것들이 『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얇은 금속조각 하나에 의지해 나름 균형을 잡으며 가는 제 아이들의 뒤를 쫓아가며 아이들이 그리는 선을 보았습니다. ‘얼음판 위에 새겨지는 아름다운 드로잉이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스케이트장에 어떤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이제 나가서 좀 쉬라고 알려주는 소리였지요.
아이들이 마지못해 나가고 나면, 몸집도 우람한 잠보니(정빙기)가 스케이트장으로 들어옵니다. 잠보니는 아이스링크의 얼음 표면을 갈아내고, 갈아낸 얼음 조각들을 수거하고, 표면을 닦아내면서 물을 뿌려 아주 얇은 막을 형성합니다. 이 거대한 놈이 한 번 지나가면 그곳은 반짝반짝 새로운 얼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종이 위 연필의 흔적을 한 번에 지워내는 성능 좋은 지우개 같았지요. ‘지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만큼이나 가슴 뛰는 일입니다.

내가 그리는 선, 그림, 실수, 좌절, 지워내기, 다시 그리기,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이는 과정들이 모든 창작 행위와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담아내보고 싶었습니다. 『선』에서는 언뜻 보면 연관 없는 두 세계가 함께 굴러가지요.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모른 척 평행으로 달리다가 어느 순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해요. 그림책은 그런 서로 다른 세계를 동시에 담아내기 좋은 매체입니다.
책 표지에도 두 가지 세계가 함께 있어요. 표지의 반쪽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반질반질하게 코팅되어 있고 그 위에서 빨간 모자 아이가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고 있어요. 나머지 반쪽은 오돌토돌 질감 있는 도화지이고, 한쪽 구석에 삐죽하게 연필이 보여요. 그림책은 물건이고, 그 물건이 주는 촉감도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제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책 안에서 어떤 완결된 세계를 내 마음대로 짓고 부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림으로만 말이에요. 글 없는 그림책은 그림의 힘으로 밀고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한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일반적인 그림책에서 글은 순서를 정해주고 무엇을 읽어내야 할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글이 없다면 독자는 그림의 디테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겠지요. 한마디로, 뭘 봐야 할지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시각적 요소로 활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그림의 디테일, 리듬과 분위기 그뿐만 아니라 책의 판형, 크기, 종이의 질감, 책의 무게 따위도 저마다 목소리를 내지요. 그림책은 총체적으로 독자에게 다가갑니다. 글이 콕 집어 이야기해주지 않으므로 이야기의 과정도 결론도 독자가 낼 수밖에 없습니다.


책에서 멋진 회전 도약을 시도하던 아이는 한쪽으로 굴러 떨어집니다. 구겨진 종이는 아이의 마음이겠지요. 어떤 독자는 책 전체에서 아이의 실수와 좌절을 봅니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요. 어떤 독자는 창작의 과정에서 늘 있는 고난의 순간보다는 그저 종이가 얼음판이 되고, 스케이트 선이 연필 선이 되고, 얼음판 위의 환상이 구겨져 버리는 반전의 지점을 봅니다.

우리는 모두 내 안의 이야기를 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봅니다. 한 어린 독자는 색색의 모자를 쓴 아이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장면을 보며 “색연필들이 등장했다!”고 했다는군요. 그림책은 근사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근사한 물건입니다.


이수지 작가는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림책을 펴냈습니다.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지은 책으로 『선』 『거울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등이 있습니다.



/ 2018-01-01 10:52


by 힌토끼 | 2018/01/09 02:20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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