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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삶이 예술이다 - ⑬ 그림책 작가 이수지 인터뷰
문화

편견을 뚫고 나온 문제적 그림책, 따끔따끔하다

[Paper 특강] 꾼, 삶이 예술이다 - ⑬ 그림책 작가 이수지


민중의 소리 인터뷰



오래전 일이다. 우리 집의 여인은 해마다 출판기획을 위해 여러 명의 어린이 책 작가와 계약을 하곤 한다. 시즌이 되면 매주 나에게 그림책을 한 보따리씩 빌려오라는 하명을 하곤 했다. 그렇게 어린이 도서관에서 이수지의 그림책을 만났다.『동물원』이었는데, 표지엔 회색빛 철망과 텅 비어있는 우리만이 쓸쓸히 있다. ‘이 작가 배짱도 좋다’고 생각하며 집어 들었다. 꼬맹이와 함께 책장을 넘기고, 마지막 페이지를 열자 웃음이 터졌다.

엄마, 아빠, 그리고 여자아이가 동물원에 간다. 그런데 동물원은 온통 황량한 잿빛이고 기린도 코끼리도 없다. 동물원엔 동물이 없다. 부모와 떨어져 공작을 따라간 아이는 환상의 세계로 진입한다. 책장을 넘기면 아름다운 화폭이다. 알록달록 온갖 동물이 뛰노는 낙원에서 아이의 웃음이 눈부시다. 아이를 잃어버린 걸 깨달은 부모들은 하얗게 질려 동물원 이곳저곳을 헤매고, 그 순간에도 남루한 현실의 동물원과 환상 속 아이의 낙원은 대비된다. 부모는 마침내 행복한 표정으로 벤치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찾는다. 동물원을 나서는 아이에게 환상의 동물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하고 황망한 표정의 부모들 머리 위엔 마지막 카피 한 줄이 남는다.  

“동물원은 참 재미있는 곳이에요”  

이수지 '동물원'
이수지 '동물원'ⓒ비룡소 제공

뭐 이건 약과다. 토끼들이 밤에 자신의 삶터를 질주하는 아이스크림 차량을 기습해 전리품, 아이스크림을 즐겁게 먹는 것으로 끝나는 『토끼들의 밤』이 있고, 부부싸움을 보며 울상이 된 소녀가 집을 나와 드레곤 같은 새를 타고 창공을 난다는 이야기를 온통 먹색으로 그린 『검은 새』도 있다. ‘환상 3부작’ 중 하나인 『거울속으로』를 정신과 치료교재로 사용하는 의사도 있다.


이수지 작가를 독자에게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런 독특한 이야기와 그림체가 가진 특유의 율동감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는 아이 엄마들에겐 너무나 유명한 작가이고, 해외에서의 인기도 대단하다. 인터뷰는 북한강이 보이는 양수리의 한적한 찻집에서 했다.


그림책, 더는 간결할 수 없는 강렬한 직관의 예술  

처음 그림책에 매료되었던 순간을 설명하면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더는 간결할 수 없는, 강렬한 직관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대학 시절, 잠깐 들렀던 교수님 연구실 서재에 꽂혀있는 많은 예술 서적들을 보았어요. 그중 유명한 화가가 작업한 아티스트 북을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미술인데 책이고,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감명받았어요. 그건 캔버스에 하나의 작품을 그렸던 전통적인 회화와는 또 다른 세계죠. 그림책은 책의 재질을 손으로 만지고 책장을 넘기며 발견하는 기쁨을 줄 수 있어요.  

전 책이라는 매체를 좋아해요. 책이 좋았던 이유는 우선 출판으로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여러 장의 그림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 책이라는 매체 특성이 좋았어요. 그게 내가 원하는 것과 딱 맞아떨어지니까 행복했죠.  

그리고 당시 보았던 존 버닝햄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죠. 깊은 이야기인데 대단히 간결하게 표현했어요. 단순한 이야기를 툭 던지는 그 방식이 너무 멋있게 다가왔어요. 이런 식이면 어른이던 어린이건 독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죠.  


서울대 회화과를 마치고 영국으로 가서 북 아트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꽤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 출판도 많고 국내 출판사인 비룡소도 외국 출판사의 저작권을 사서 출판하고 있더군요.  

대학 졸업 후 일러스트 일을 시작했는데, 그림을 일로 받아 하니 금방 지치더라고요. 갓 졸업한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고민은 다 비슷하지요. 내 작업을 하고 싶은 강박과 돈을 벌어야한다는 압박이 동시에 오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였고, 일을 할수록 내 안에서 내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솟아올랐지요. 그래서 궁리 끝에 영국에 있던 북 아트라는 전공으로 짦은 공부를 하러 떠났어요. 제가 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어서 공부 자체에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갔어요. “뭐 얼마나 새로운 내용이 있겠어?”하고... (웃음) 잘 모르고 갔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들이 책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서 내 관심사를 집약적으로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문화적으로 풍부한 곳이기도 하니까 그때 보고 들은 것이 이후 창작에 큰 원천이 되기도 했죠.  

그 기간 동안 갔던 이탈리아의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젊은 작가들이 출판사 부스를 찾아다니며 포트폴리오와 작품을 보여주면서 설명하고 조언을 얻거나 출판 기회를 잡는 것을 보고 배웠어요. 그림책에 대한 현실감각을 얻게 된 계기였어요. 출판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작품 경향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거든요. 이후엔 저도 출판사와 조밀하게 약속을 잡아 제 그림을 설명했어요. 그렇게 부딪히면서 이탈리아에서 첫 책이 나오고 이후에 출판사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안정적으로 책을 낼 수 있었어요.  


아이에겐 편견과 어른들이 고정시킨 정형이 없어. 보이는대로 그림을 이해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그림책을 좋아하는 팬이기도 합니다. 그림책 문화가 정립된 서구에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국내 동화작가라면 엄두 내지 못했을 그런 이야기와 결말 말입니다. 스웨덴에선 동성애 부부 가정의 아이를 위한 책도 많고, 책 내용도 파격적인 것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웃음) 맞아요. 에드워드 고리가 그린 ‘줄어드는 아이 트리혼’ 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1978년도에 나온 책이에요. 분도출판사에서 철학 동화를 그림책 시리즈로 냈죠. 부모의 무관심으로 아이가 점점 줄어들어요. 점점 식탁 밑으로 내려가요. 그런데 부모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관심도 없어요. 아이는 말하고 싶지만, 어른들은 ‘작아지고 있다’는 아이의 말에 관심이 없죠.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이 아이는 보드게임을 하다 다시 원래의 키로 돌아와요. 작가는 소통되지 않음을 표현했어요. 차가운 흑백의 드로잉 펜으로 그렸는데 화면구성도 평범하고 그림만 봐서는 이게 뭐지 싶은 책이에요. 그런데 글과 그림이 아주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을 남겨요. 이 책이 제 머릿속에 남은 최초의 책인 것 같아요. 

아이가 줄어들어 식탁위론 아이의 눈만 보인다. <br
아이가 줄어들어 식탁위론 아이의 눈만 보인다. ⓒ논장

영국에서 모은 이상한 책들이 많아요. 위 책과 같은 화가인 에드워드 고리의 어떤 알파벳 책은 A부터 Z까지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죠. 그런데 이 책은 그 이름을 가진 아이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는지를 알파벳 순서대로 늘어놓아요. 이 괴상한 책이 하나의 고전이 되어버렸지요. 서구에선 이런 특이한 그림책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주지요.  

‘거울속으로’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좀 멍했습니다. 거울을 보며 놀던 아이, 하지만 그림자가 되어야 할 거울 속 분신이 따로 움직이고... 이에 화가 난 아이는 결국 거울을 깨버리잖아요? 철학적인,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셨나요? 동료에게 이 작품을 보여줬더니, 억압된 자아와 뛰쳐나가려는 잠재의식 간의 갈등과 교차를 그린 심리학적 문제작이라면서 웃더군요. 이런 결말은 동화작가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 같아요.  

(웃음) 맞아요. 동화, 그 동(童)이 들어가는 순간 그렇죠. 전 그림책 작가죠. 고정관념 속의 ‘동화’작가라면 제한받는 영역이 많아요. 그림책은 독자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줘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죠. 한 장 한 장 얼마 안 되는 그 의도를 가지고 그리거든요. 글쎄요. 제 작품이 딱히 철학적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거든요. 아이들의 반응도 여럿이라 이것도 흥미로워요. 친구와 놀다 친구가 자기랑 똑같이 하지 않는다고 밀쳐서 친구가 사라졌다고 해석하는 아이도 있죠.

거울속 분신은 처음엔 아이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지만,  점차 따로 춤을 춘다
거울속 분신은 처음엔 아이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지만, 점차 따로 춤을 춘다ⓒ비룡소

‘거울속으로’의 결말을 보고 독자들이 질문을 많이 해요. 그런데 어떤 편견과 전형을 내려놓고 보면 그냥 거울 하나가 깨진 것이죠. 거울은 깨지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깨지는 것이 임팩트가 크다고 생각했어요. 깨져봤자 종이죠(웃음). 이 결말을 두고 여러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결론은 있지만, 그림은 하나의 정답만을 주지 않아요. 다층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그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어요.  

아이들은 그림책의 첫 장만 넘겨도 지루한 책인지 아닌지 금방 안다고 한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한 그림에 어른도 즐길 수 있는 상상력을 준다는 것. 그래서 서구에선 이미 그림책이 중요한 독립적인 한 장르로 정립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스위스는 ‘토끼들의 밤’을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았을까  

이수지 '토끼들의 밤'
이수지 '토끼들의 밤'ⓒ도서출판 '책읽는곰' 제공

‘토끼들의 밤’이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뽑혔다는 보도를 보고 아내와 한참을 웃었습니다. 호러물로 보는 어른도 있을 것 같은데, (웃음) 스위스라서 가능하겠구나 했습니다. 작품 ‘검은 새’ 나 ‘토끼들의 밤’을 들고 나오셨을 때 출판사 편집장들의 반응이 엇갈렸을 것 같습니다.

‘토끼들의 밤’ 의 경우 스위스에서 처음 출간 되었고, 2003년에 스위스 문화부에서 주는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상을 받았지만, 정작 한국 출판은 2013년 이었죠. 미국에서는 몇 차례 거절당했는데, 미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지요. 미국에서 토끼의 이미지는 매우 사랑스러운 캐릭터예요. 나라마다 조금씩 정서가 다르고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도 다르지요.

‘검은 새’의 경우는 미국의 한 편집장이 어떻게 아이들이 읽는 책에 이런 내용을 넣을 수가 있냐면서 화를 내기도 했어요. 폴란드에서 출판되었을 땐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고 들었어요. 열성 팬들이 있었고, 너무 잔인한 이야기라며 항의하는 독자도 있었어요. 이 책도 미국의 출판사에서 여러 번 거절을 당했죠.  

그런 반응을 신경 쓰지 않습니까? 독특한 자신의 작품 경향에 대해서요.

(웃음) 아뇨.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아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많이 보지만, 막상 그림책을 구매하는 주체는 부모들이잖아요? 엄마들 입소문이 나야 잘 팔린다고 하는 출판사 편집자의 입장도 있겠지요. 그런 가이드라인 같은 것을 고민하시나요?  

그다지 고려하지는 않아요. 딱히 생각해도 훌륭한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요. 그저 감각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정도 이야기는 어른과 아이들과 모두 나눌 만 하다는 그런 감각이요. 물론 세상엔 좋은 책들이 많지만, 그 수많은 책들 중에 결국 마음을 먹고 사려고 지갑을 열게 되는 어떤 포인트가 있는데, 그건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림책 작가, 들려주고픈 이야기와 자기만의 그림체를 가져야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 그림책을 함께 보다가 매료되어 그림책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엄마들도 꽤 많습니다. 우선 아이를 키우며 교감한 경험이 그림책 작가로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리고 출판사의 벽이 높아 아직 출판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고민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독자를 어린이로 상정했다면, 아이를 키우며 관찰하며 포착했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아이들 말과 상황들 말이에요.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소재죠. 아이를 키워보면 더 세세히, 생생히 느낀 것을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지요. 물론 필수는 아니에요. 그림책은 보편성을 다루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림책이라는 분야를 ‘단순히 그림이 좋아서, 혹은 동화니까’하고 쉽게 보아서는 안 돼요. 스스로 하고픈 이야기가 있어야하고, 어떤 독자에게 다가서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명확히 있어야 해요.  

미술전공자가 아닌 유명작가도 많아요. 혼자서 공부한 사람들이죠. 볼로냐에서 만났던 베이트리체 알레마냐(Beateice Alemagna)가 “나는 한 번도 미술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어요. 원하는 이미지가 확실하면 이런 방식의 독학도 가능하죠.

존 버닝햄 40주년 기념 엽서
존 버닝햄 40주년 기념 엽서ⓒnaver blog / egoist98

저는 그림책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특별히 잘 알지는 못 했어요. 정말 그림을 좋아했고, 결국은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 결정하면서 그림책 작가가 된 경우에요.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한 정해진 경로는 없어요. 상식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떤 경로로든지 얻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내 머릿속의 것을 빨리 눈앞에 꺼낼 수 있으려면 손이 훈련되어야 하고, 글과 구성에 대한 문학적 감각도 필요해요. 매체에 대한 감수성을 예민하게 다듬기 위해 가진 방법을 모두 동원해야겠지요. 영화도 보고, 전시도 보고, 도서관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책들을 모아놓고 정리를 하다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책과 작가를 보면서 조금씩 가지치기를 해나가는 거죠. 자신이 원했던 결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야지요.

빙판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표지 우측을 특수코팅을 입혔다.
빙판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표지 우측을 특수코팅을 입혔다.ⓒ이수지 제공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볼로냐 픽션 부문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뉴욕타임스 올해의 그림책,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 올해의 원화 금메달, 브라질 아동도서협회 ‘글 없는 그림책 상’ 등. 싱가포르에 오랫동안 있었고 출판도 해외에서 많이 하셨는데요.

남편 일 때문에 싱가포르에 6년 있었어요. 아는 이들이 없었기에 온전히 저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자극도 많이 받고요. 단점은 너무 덥다는 거죠(웃음) 해외에서의 출판은 이래저래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죠. 책이 나오고 조금이라도 주목을 받으면 다음 출판 의뢰도 들어오고, 기존 출판사와도 돈독해지면서 계속 함께 일하게 되지요. 

얼마 전에 미국에서 열린 IBBY 콘퍼런스에서 출판관계자들과 이야기했는데, 미국에서는 요즘 점점 더 많이 팔린다는 거예요. 저는 전 세계적으로 그림책이 불황인 줄 알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하도 책이 안 팔린다는 소리만 들어서... 미국에서는 특히 그림책 작가에 대한 팬 층이 두터워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그림책 애호가가 되고 있다고 했어요. 저와 자주 일하는 이탈리아의 작은 출판사도 실험적인 책을 많이 내는데, 책의 종수도 늘어나고 점점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있어요. 그 비결을 물어보면 독자 스펙트럼이 넓고 특정 작가가 책을 내면 무조건 사고 보는 일종의 마니아층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해요.  

미국의 경우, 시장규모도 다르죠. 그리고 비록 신인이어도 팔릴만한 책이라고 판단하면 출판사에서 비용을 들여 전국 순회강연을 기획해요.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의외로 많은 편이죠.

한국에선 자기 작업만 해선 살아남기 어려워요. 일러스트에 대한 단가는 여전히 낮고, 지난 이십년간 변화가 없어요. 그림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아직 미비하죠. 그런데도 지금 우리나라 그림책은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어요. 정말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 군들도 두터워지고 있고요. 우리나라는 어린이 책은 부모님이 교육용으로 산다는 고정관념이 있고, 또 그림책 작가에 대한 인식도 넓진 않죠. 좀 더 다양한 작가, 그리고 다양한 독자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책의 통념을 전복한 문제작, 현실과 환상의 경계 3부작  

이수지 작가의 『그림자놀이』,『거울속으로』,『파도야 놀자』를 현실과 환상의 ‘경계 3부작’이라고 한다.(이하 3부작) 책의 가운데 제본선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이고, 이 선을 기점으로 아이의 현실과 환상은 서로 스며들며 경계를 흐린다. 아이의 환상이 더욱더 깊어지면 경계선 허물어지고, 이 장면은 그림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극적 이미지가 되곤 한다.

이수지 '파도야 놀자'
이수지 '파도야 놀자'ⓒ비룡소 제공

‘파도야 놀자’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뒤집어진다는 두 개의 장면을 모았다. 상단의 장면은 환상 영역의 파도가 현실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단절이 보인다. 인쇄나 제본오류가 아니다. 하단은 아이가 파도의 물세례를 받고 난 모습. 예민한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현실과 환상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 하늘마저 파랗게 물들었다.  

이수지 '그림자 놀이'
이수지 '그림자 놀이'ⓒ비룡소

‘그림자놀이’에선 노란색이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몽환의 세계다. 처음 비교적 선명하게 현실을 반영하던 그림자는 아이의 몰입에 따라 점점 독립된 환상을 만들어간다. 그림을 보면 그림자놀이가 무르익어 이미 몽환의 경계를 뚫고 나온 새가 보이고 주둥이를 내밀고 나오는 늑대 가 보인다. 그리고 새와 늑대가 묻히고 나온 환상세계의 노란 물감이 보인다. 이렇게 경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책을 뒤집어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13개 국어로 출판된 ‘파도야 놀자’, 정신과 치료교재로 쓰인 ‘그림자놀이’

'파도야 놀자' 프랑스어판 'La vague'
'파도야 놀자' 프랑스어판 'La vague'ⓒ이수지 제공

3부작 중 가장 많이 읽힌 책이 ‘파도가 놀자’지요? 어떤 나라에서 출판되었습니까? 작가님 그림책에 대한 해외 독자들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작가님 그림책을 가지고 한국의 특수교육 분야나 해외 학교에선 토론학습 자료로도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현재 13개 언어로 출판되었어요. 미국, 일본, 중국, 포르투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터키 등이죠. (웃음) 제가 몇 개 나라를 이야기했나요? 그중 이탈리아 독자들이 가장 뜨겁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좋으면 표현을 엄청 열정적으로 하세요. 볼로냐에 갔는데 도시 여기저기 서점에 제 책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더라고요.

이탈리아의 심리치료사 한 분은 ‘거울속으로’를 읽고 이걸 환자 거식증 치료에도 쓰셨어요. 제 작품을 아주 좋아해서 워크숍에도 오셨다고 했지요. 제가 하는 이벤트엔 모두 참가해서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셨죠. 환자들이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데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해요. 이 작품은 우리나라 청소년 센터에서도 상담사분들이 사용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고 해요.

이수지 '파도야 놀자' 인물 스케치
이수지 '파도야 놀자' 인물 스케치ⓒ비룡소

‘3부작’은 곳곳에 꼼꼼히 살피면서 읽는 재미를 숨겨놓으셨어요. ‘파도야 놀자’에선 아이와 파도의 놀이(실랑이)를 갈매기들이 조연으로 나와 표현하고, ‘거울속으로’에선 현실의 아이와 환상 속 아이의 위치가 바뀌잖아요? 그런데 정말 독자들이 그렇게 예민하게 알아차립니까?

아니오.(웃음) 정말 날카로우신 분들은 알아차리세요.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뜯어보면서 제가 숨겨놓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발견하진 못하세요. 그래도 책을 읽는 데는 지장 없어요.

꼭 3부작이 아니더라도 작가님의 작품에는 몽환의 세계, 그러니까 아이의 시선과 동선을 따라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거나 다시 현실과 분리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런 건 어떤 작가님의 철학이나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봐도 될까요?  

그렇게 의식적으론 한 것은 아닌데요. 작품을 계속하다 보니까 스스로 알게 되었어요. 내가 환상, 이런 것에 관심이 많구나. 제 작품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한 공간에서 존재해요. 그림책 ‘선’에선 매끈매끈한 얼음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와 연필이 모두 주인공이에요. (작품의 시작은 하얀 종이 위에 거침없이 선을 그리는 연필이 있고, 이 연필은 결국 맵시 있게 스케이팅을 하는 아이가 된다)  

역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행위일 수밖에 없죠. 현실을 인식하는 또 하나의 방법 같아요.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 나머지 것들은 보이지 않죠. 현실에선 늘 실존하지만 본인이 인식하고 바라보는 방식으로 보는 것일 뿐이죠.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어요. 장자(莊子) ‘세상은 마치 새끼줄처럼, 서로 반대되는 음양이 꼬아져 만들어 진다’고 했어요. 이렇게 사는 것, 살면서 생각한 것을 그림으로 풀어내곤 해요.

지방에서 특수교육 관련 일을 하시는 분이 계세요. 아이들의 책 읽는 집중력은 떨어지지만, 좋아하는 책은 해를 넘겨도 계속 보는 아이들이 많다고 해요. 특정 대목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도 재미있다고 하시더군요. 이수지 작가의 책은 단연 인기라고 합니다. 두고두고 다시 읽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한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책을 넘겨서 짚어내는 모습이 좋다고요. 혹시 이런 아이들을 위한 교보재나 그림책을 고민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요. 아직 적극적으로 고민하진 않았지만, 그 분야를 잘 알게 된다면 작업을 하고 싶어요. 알고 싶기도 하고요. 궁금해요.  

늘 새로운 방식으로 재미를 주는 작가로 남고 싶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창작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창작방법, 소재를 얻는 작가님만의 습관이 궁금합니다. 시나 소설 작가들은 여행을 가서 여러 가지 단서를 얻는다고 합니다만.

창작하려면 아무래도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죠.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들과 저 사이에도 이제 어떤 리듬이 생겨서, 작업시간에 ‘엄마를 방해하지 말아줘’ 하면 그렇게 도와줘요. 나름대로 짦은 시간에 효율성을 극대화할 방법을 동원해요.

모든 작품은 그 전 작업 단계에서 전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 작은 씨앗 같은 생각들이 무르익어 정리되어 살아남는 것은 책으로 나옵니다. 영국에서의 그 짧은 사유의 기간 파생되었던 이야기가 지금 하는 작업들의 소재가 된 것 처럼 말이에요. 어떤 작품은 굉장히 빨리 나와요. ‘거울속으로’는 한쪽 면이 거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본 작업에는 딱 일주일이 걸렸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년 정도의 프로젝트였어요. ‘그림자놀이’ 같이 구성이 잘 짜여야하는 그림책은 7~8개월가량 잡고 있었어요. 

다음 달 1월에 새로 나올 책 ‘강이’는 저희 가족이 키우던 개 이야기에요. 저희가 외국에서 몇 달 살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는데, 그 동안 부모님 댁에 맡겨 두었던 강이에게 슬픈 일이 생겼어요. 돌아와서 보니 집 마당이 텅 비어있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아이들이 강이와 함께 있던 시절을 너무나 행복하게 추억하고 있는데, 지금 이 감정을 놓치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 생각이 들자마자 빨리 그려낸 그림들이 책이 되었어요. 

다음달 1월 출간 예정이다.
다음달 1월 출간 예정이다.ⓒ이수지 제공

그림책에도 노래처럼 글 작가가 있고 그림 작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작업할 경우 키를 잡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글 작가가 먼저 제안을 해요. 누가 메인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작가는 열려있어서 창작에 관한 한 그림에 따라 글이 바뀌기도 하고, 그림에 대한 수정 상의도 하죠. 그렇게 서로 밀어 올리면서 창작물이 나오거든요. 외국 작가들과 작업할 땐 바로 수정하진 않아요. 그건 편집자의 역할이죠.

'아빠 나에게 물어봐' 의 한 장면
'아빠 나에게 물어봐' 의 한 장면ⓒ비룡소

‘아빠, 나에게 물어봐’의 텍스트를 받았는데, 그 배경을 빨간 단풍이 지천으로 깔린 가을로 하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설정했어요. 그리고 그 자유로운 대화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우리 집 아이가 아빠에게 재잘거리며 하는 모습을 담았어요. 아이와의 대화에서 “빨간색이 제일 좋아!”라는 말이 나와서 이걸 모티브로 잡아서 작업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서 합의하면 작업이 되는 것 같아요. 서로 동등한 관계라고 봐야지 즐거움이 있어요.  

이수지 '이렇게 멋진 날'
이수지 '이렇게 멋진 날'ⓒ비룡소

해외 출판사에서 원고를 보내오면 여러 번 읽어도 잡히지 않는 작품이 있고 제목만 읽어도 어떤 시퀀스가 떠올라 마지막까지 가면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어요. 그런 작업은 정말 재미있죠.  

부모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그림책을 함께 보며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이와 책을 보면서 부모가 연기하며 읽어주는 방법도 있고, 아이가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그저 읽는 것을 지켜보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세요?

중학생이 될 때까진 읽어주는 것이 좋다고 봐요. 물론 아이가 커가면서 혼자 읽는 시간이 늘어나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도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부모와 함께 책 읽는 경험을 길면 길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읽어주는 사람의 태도를 보고 느끼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책은 정말 신이 나서 이야기하게 되고 그러면 아이들은 더욱 강렬하게 느끼죠.

'난 커서 표범이 될꺼야'
'난 커서 표범이 될꺼야'ⓒ풀빛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의 작품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를 서점에서 반쯤 읽다가 압도되었어요. 전 책 읽기를 멈추고 책을 사가지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봤어요. 갈피갈피 놀라움이 들어있어요. 그 결말을 함께 공유하면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 되는 거죠. 어떤 예술적 감흥을 함께 매일 밤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고 그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이 돼요.

그림책 작가이기에 아이를 키우는 데 더 좋은 점이 있다면요?  

우선 집에 그림책이 많아요. (웃음)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니까요. 아이들이 제 서재를 보고 “엄마 그림책엔 이렇게 이상한 책들이 많아?”라고 하곤 해요. 하하하. 제 취향과 아이들 취향이 다르지만 모두 공유해요.  

내가 집에서 작업하는데, 아이들이 엄마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이 중 한 명은 옆에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어요. 아직 아이들에게 그림이나 무언가를 안 가르치고 있어요. 아이들에겐 이 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겠죠.

인터뷰 때 늘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남고 싶습니까?

우선 하고 싶은 것의 목록이 무척이나 길어서 (웃음) 오래 작업하고 싶고요. 그리고 전 끊임없이 새로울 수 있는 작가였으면 해요. 자기 스타일에 안주하는 작가. 물론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 있겠지만, 내가 새로움을 줄 수 없다면 나도 독자들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이수지 작가가 그린 자신 캐리컬쳐
이수지 작가가 그린 자신 캐리컬쳐ⓒ이수지 제공

이수지 작가는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책을 펴냈습니다. 2016 국제 안데르센 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쓰고 그린 작품으로 <선>, <거울 속으로>,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 <동물원>, <나의 명원 화실>, <검은 새> 등이 있습니다.

by 힌토끼 | 2019/01/04 08:26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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