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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으로 이수지 작가가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일까 이모저모 상상해보았지만 책의 형태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2020. 06. 05)



‘물’이라는 낱말은 ‘눕는다’와 어울린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도 “물에 눕는다.”는 말의 느낌만큼은 상상할 수 있다. 아무리 고단한 몸도 물에 누우면 스르르 풀린다. 물은 뻣뻣한 우리 몸을 부드럽게 밀어 올려 살짝 띄워준다. 형태가 없는 것은 물이지 내가 아닌데 물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물처럼 유연해진다. 번잡한 생계의 전원을 차단하고 완벽히 쉬고 싶을 때 루시드 폴의 음악 ‘물이 되는 꿈’을 자주 들었던 것은 그 음악에서 한없이 너그러운 물의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은 붙들지 않고도 꼭 안아주는 법을 안다.

이 음악으로 이수지 작가가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일까 이모저모 상상해보았지만 책의 형태를 상상하지는 않았다. 책은 온 세상을 일정한 크기의 네모 안에 담겠다는 집념이 있는 물체다. 동서고금에 “책장을 덮으며”라는 관용구가 있다는 것은 책 한 권의 마지막 장이 가지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더 보고 싶고 더 꿈꾸고 싶어도 이제 그 꿈들은 끝이며 현실이 시작된다는 사인으로서 책장을 덮는 일만큼 선명한 것은 없다. 『물이 되는 꿈』도 책이니까 네모일 것이라는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림책 『물이 되는 꿈』은 책이라는 사물이 지닌 근원적 경계를 허물고 무한의 네모를 만들었다. 점에 점을 더하면 직선이 되고 직선에 직선을 더하면 영원이 되듯이 작가는 네모에 네모를 더하면 무한한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했다. 그 위에 노래를 띄운다면 우리는 멈추지 않고 꿈을 재생할 수 있을 것이다. 폐곡선의 한 부분을 열어버리면 영원의 도형을 상상할 수 있다. 루시드 폴은 음악 ‘물이 되는 꿈’에서 낮은 도와 높은 미 사이를 물처럼 잔잔하게 오가며 노래한다. 음악이 물과 닮아있다. 그런데 그림책으로 이를 재현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음악이 시간 친화적이라면 그림은 공간 친화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시간을 상상하는 것보다 무한의 공간을 떠올리는 것이 훨씬 어렵다. 예를 들어 우리처럼 가로쓰기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오른쪽 모서리에서 한 번 끊지 않고 책장을 넘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수지 작가는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 절단면을 이미지로 과감히 연결해버렸다. 비결은 접고 펴는 그림책의 모양, 전통적인 아코디언 폴드(accordion fold) 방식에 있다.

이 책은 얼핏 나비 같기도 하고 돌고래 같기도 하며 새 같기도 한 파란 생명체로부터 시작한다. (알고 보면 그는 바다사자이다.) 수영복을 입은 어린이가 보호장구를 잘 갖추고 조심스럽게 물 위에 눕는다. 이때 바다사자도 아이를 따라 들어가는데 독자는 이 동행 덕분에 안심한다. 이제는 마음 놓고 노래하면 된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직각으로 앉아있었던 어린이의 몸은 물과 평행이 된다. 짧은 수직의 경험을 지나 길고 긴 수평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물이 되는 꿈속에서 우리는 소금도 되고 산도 되고 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이 느긋하고 여유만만한 수평의 노래에 수직의 욕망은 끼어 들 틈이 없다. 『파도야 놀자』에서 이미 함께 즐겁게 놀았고 <심청>에서 함께 통곡했던 이수지 작가의 ‘파랑’은 또 다른 파랑으로 변모한다. 이 그림책의 맑은 물빛 파랑은 영원의 파랑이다.

아코디언 폴드 방식은 수작업이 까다로워서 출판사들이 반기지 않는다. 이 그림책도 한 장 한 장을 이어 붙여서 가로 길이만 5미터다. 이수지 작가는 이를 통해서 물과 시간의 영원성을 책이라는 사물에 담는데 성공했다. 작가는 이 책을 그리면서 수중재활센터를 취재했다고 한다. 지상에서는 겪는 어린이들의 불편함은 물과 함께 누그러진다. 그리고 안전하고 자유로운 꿈을 꾼다. 우리는 그림책 속 어린이가 지상에서도 안전하고 더 편안해지기를 바라며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수백 마리의 파랑 나비가 바다 위를 나는 모습에서 한 번 울컥한다. 우리가 바다와 나비를 생각할 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푸른 바다와 하늘 어딘가에서 그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진실규명에는 공소시효가 없는 것처럼 애도의 마음에는 끝이 없다.

이 그림책의 기나긴 뒷면은 루시드 폴이 직접 손으로 그린 악보에 이수지 작가가 그림을 덧그리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음악과 회화는 그림책이라는 제3지대에서 이렇게 만난다. 사실 이 그림책의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그림책 전체를 가로로 펼치는 순간에 나타난다. 물이 우리를 서로 만나게 하고 물이 우리를 안아준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눈에 깨닫게 되어버린다. 책을 모조리 펼쳤을 때 우리는 수평선으로서의 물이 아니라 대양과도 같은 물을 만난다. ‘내가 되는 꿈’을 만나는 감동적 순간이 거기 있다. 아코디언 폴드라는 어려운 공정을 진행해주신 출판 노동자의 손길에 감사드린다.

아코디언 폴드 방식의 다른 걸작 그림책으로는 『나무, 춤춘다』(배유정 글. 그림. 반달)가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지닌 유구한 역사성을 세로로 15미터 길이의 그림책으로 표현했다. 엠마 줄리아니의 『나, 꽃으로 태어났어』(이세진 옮김. 비룡소)는 꽃다발처럼 손에 쥐어지는 책이다. 꽃밭의 꽃송이들이 활짝 피어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아코디언 폴드를 활용했다. 백희나의 『어제 저녁』(책읽는곰)이나 하수정의 『울음소리』(웅진주니어)는 도심 공동 주택의 연결과 연대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코디언 폴드 방식을 썼다. 그림책은 새로운 세계의 모양을 가르쳐준다. 그 모양의 세계를 만들어갈 사람들은 손으로 접고 펼쳐 가면서 책을 읽는 수고를 즐기는 손의 주인, 우리들이다.
by 힌토끼 | 2020/06/05 15:50 | 그림책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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