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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넘어 고개” 이야기
<고개 넘어 고개> 이야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새로운 조합은 있다. 전혀 관련 없던 것들이 만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발전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또 새로운 책을 만든다.

바캉스 공동작업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에는 49개의 단어가 나온다. 그 중 하나가 "고개" 였다. 

실은 보따리 책의 내 그림들은 이 고개 그림으로부터 시작했다. 선을 겹쳐 그리고 싶었다. 청화백자 같은 파란 선, 회화적이라기보다는 그래픽적인 느낌, 그래픽 적이지만 디지털로 그린 선이 아니라 손으로 그려 살짝 찌글찌글한 선들이 모인 느낌. (이 그림을 보고 누군가 나중에 물었다. 이거 손으로 다 그린 거죠?....성공.) 여러 선을 그려 기본 판을 만들고, 그저 느낌대로 고개의 모양으로 잘라 얹어가며 서로 겹치게 했다.

선들이 겹쳐서 고개가 되고, 고개들이 겹쳐서 고개 고개 넘어 페이지들이 되었다. 무대는 펼쳐졌고, 이제 저 고개 위에서 놀아야지.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로 접어 들면 바뀌는 풍경- 늘 생각한다. 거참, 진짜 산이 많구나. 터널 넘어 터널, 겹치는 능선의 아름다움- 이렇게 산이 많고 깊으니 그토록 많은 호랑이 이야기가 있는 게 놀랍지 않다.(이번 강혜숙 작가의 <호랑이 잔치>에도 온갖 호랑이가 나온다. 과연, 줄줄이 꿴 호랑이가 허풍이 아닐 수도 있겠어.)

고개나 산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모아 보았다. 고개에 관련된 전설이나 민담이 모여있는 책들도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재밌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는 대충 다 산속에서 일어난다. 고개는- 동물에게는 삶의 터전이지만, 인간에게는 그저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고 얼른 넘어 이동해야 할 장소일 뿐이다. 내가 관심있는 것도 고개에서 "인간"이 여러 동물과 혹은 초자연적 존재 (산신령, 선녀, 귀신 등)과 엮이는 쪽이란 것을 확인. 어차피 다 들어갈 수도 없는 작은 공간이라 대충 추려보니, 열 여덟 이야기가 들어가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도 넣을 걸 그랬다)

몇 개의 고개로 할까? 서정오 판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보니 떡장수 아주머니가 다섯 고개째에서 호랑이에게 잡혀먹히더라. 다섯 고개. 적당해 보이네.

*

지난 바캉스 시즌1에서는 병풍책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늘을 산 총각"을 만들었다. "그늘이 점점 길어져 부자영감네 집까지 뒤덮었다"라는 텍스트에 얼른 길어지는 병풍책을 떠올렸다. 병풍책은 독자가 얼만큼 펴서 보느냐에 따라 한페이지 짜리, 두 페이지 짜리, 혹은 여러 페이지 짜리..원하는 만큼의 그림이 만들어진다.

이 재미를 이어 만든 책이 "물이 되는 꿈"(루시드 폴 노래하고 이수지 그리다. 청어람아이 2020)이다. 이 책에선 일반적인 두 페이지 펼침면으로 그림이 끊어지는 듯 하지만, 결국은 5.75m로 이어지는 32페이지 전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옆으로 펼치는 병풍책을 실컷 만들고 나니, 이번에는 접는 방향을 달리 해보고 싶었다. (이제 보니 이건 내 패턴인가보다. 경계 삼부작도 그렇게 책을 돌려가며 옆으로 위로 펼치더니..) 어쨌거나 고개 모양 그대로 인쇄해 그대로 접어서 세워보니 "고개 너머 고개"가 되겠구나 싶었다. 처음엔 단순히 네모 페이지들이 산처럼 겹쳐졌다. 페이지의 접힌 단면 직선을 살리는 게 책으로서 쿨하지. (실은 페이지를 고개 모양으로 오려내고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직선이 쿨하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쿨함) 

<고개 넘어 고개> 첫번 째 더미

그런데 이렇게 해보니 앞 산 너머 뒷 산은 잘 보이지 않았고, 지나치게 페이지 수가 많이 나왔다. "물이 되는 꿈"에서 이미 많은 페이지를 붙이는 일이 쉽지 않고, 붙일 때 마다 다 돈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는데, 흰토끼프레스 사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줄여! 줄여!

페이지를 줄이면서 동시에, 남는 공간 (늘 이야기 하듯 병풍책의 약한 고리- "광활한 뒷 면")을 없애려다보니, 그리고 뭔가 모르게 부담스런 "위로 고개 넘기" 보다는 "지그재그로 고개를 옆으로 열기"가 낫겠다는 판단. 결국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리 하니 또 페이지가 왼쪽으로 열렸다 오른쪽으로 열렸다 난리도 아닌 포맷이라, 텍스트가 잘 읽히기는 과감히 포기하고 (역시 화가는 글을 쉽게 포기한다), 이 책에서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 그저 "고개 넘어 고개"가 시각적으로 재현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장이 돈 아끼려고 안 붙이고 많이 우겨 넣어 해결하려고 머리를 쓰고 있는데, 팝업을 제시하지를 않나 처음엔 사장보다 더 고난이도의 포맷을 마구 던지던 디자이너 쎈이 결국 신박한 아이디어를 냈다. "한 장에 하나만 찍어! 그리고 도무송 그렇게 안 비싸!" 

도무송! (이게 톰슨 Thomson (영국의 톰슨 프레스에서 시작했다는 칼선 가공)이었다는 것을 듣고 박장대소) -결국 해 보고 싶은 건 다 한다. 과연 아티스트에겐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된다/안 된다"를 알려주면 또 거기서부터 상상력이 길을 찾는다. 그렇게 안 비싸단다. 견적 내 보니 괜찮다. 가자.

고개 넘어 고개 두번째 더미. 대충 잘라 본 고개의 선. 

보따리 책 감리보러 갔다가 간 김에 별 색 파랑을 골랐다. 주변의 (강작, 조작. 쎈) 저마다 "이 파랑이 더 좋은데"를 분연히 물리치고 처음부터 마음을 뒀던 청화백자와 가장 가까운 색을 골랐다. 먹과 파랑, 2도다. 종이는 "그늘을 산 총각" 때 썼던 마분지를 다시 쓰기로 하고. 색이 얹힐 때 쨍한 맛은 없어도, 한지 같은 종이 질감이 전래 프로젝트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결국 나온 최종 결과물은 이렇다.












도무송 라인이 잘 떨어졌다, 마분지의 두께감덕에.


지그재그로 열면 이런 텍스트가 펼쳐진다. 텍스트는 바로 앞 면 그림에 대응한다. 열여덟 이야기 중 당신이 아는 이야기를 맞추어보시라. 정답은 뒷 표지에.

앞 표지는 이렇게.


"그늘을 산 총각"과 이어지는 느낌을 주고자 케이스를 만들었다. 그늘 때는 기존의 크라프트 씨디 케이스에 먹 인쇄만 했는데, 이번엔 아예 만들었다. 케이스는 by 쎈 디자인. "넌 천재야!" 이 말로 퉁치고 넘어가기엔 너무 잘 만들었잖아.

곧 독자의 손에 들어갈 책들.

원주 문아리 전시 오픈과 함께 첫 선을 보인다.
"고개 넘어 고개 책"은 전시로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처음에는 책을 그대로 포맥스나 합판으로 크게 짜려고 하다가 뭔가 겹쳐지는 고개, 살랑이는 고개, 관객이 사이로 드나들 수 있는 고개를 생각하다가 천 인쇄로 가닥을 잡았다.


설치 날. 김병재 감독님이 작가의 변덕으로 사다리를 여러 번 오르내리심.

책에서 겹쳐지는 고개를 따로 떼 네어 아홉장으로 만들었다.


곧 오픈할 전시 사진은 다음 포스팅에.

하나 더, 자매품 "고개 넘어 고개" 포스터 : 마분지에 2도 인쇄, 규격 18.5x 40cm



이스터 에그 Easter Egg - 고개 포스터에 작가의 얼굴이 숨겨져 있다. 찾아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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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힌토끼 | 2020/10/03 11:25 | 바캉스 프로젝트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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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글쎄 at 2020/10/05 18:24
두근두근 창조본능이 되살아 납니다 ,, ♡♡♡♡
Commented by 제주꽃미남 at 2020/10/07 23:37
우와!!!! 두근두근 멋지네요!!
뜬금없이 ㅠㅠ 선생님! 작년 심청 책은 구할수 없는걸까요? 우연히 책을 작년에 봤는데 너어무 잊혀지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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