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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차_P1_물건들: 오일파스텔, 순발력, 여백


요즘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직 스케치 단계이기도 하고, 본격적인 본문 그리으로 들어가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태블릿으로 그리면 계획을 바꿀 때 마다 순발력있게 수정할 수 있다. 계속 물과 물감을 보충해야하는 현실 펜이나 붓과는 달리 무한정 나오는 선이 무척 편하다. 태블릿에 그려지는 선은 패턴이 있다. 일관된 결과를 준다. 그릴 때는 별로 의식하지않고 그리지만, 현실 재료를 손에 잡고 그릴 때는 재료가 그어지는 방향은 제 멋대로이다.

가끔 작업실에 촬영팀이 오면 이런저런 주문을 하신다. 그 중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컷은 내가 그림 그리는 장면이다. 나의 정체성은 화가구나-그림 그리는 그림이 필요한 것이구나-그 때 깨닫는 내가 이상하긴 하다. (그럼 노래를 부를테냐, 춤을 출테냐)

늘 하는 것이라도 누가 보고 있을 때 그리는 것은 슬쩍 긴장이 된다. 게다가 카메라라니. 카메라의 기억을 미화시킬 수도 없고-내가 그리는 대로 정직하게 기록될 예정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긴장된다. 누가 보고 있는데, 순발력있게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어렸을 때, 그림그린다고 하면 "그림 잘 그리겠네? 한 번 그려봐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좋아하지 않았다. 희극인이에요-한 번 웃겨봐요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것 그려라 저것 그려라 구체적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슬슬 마음 속에 연기가 피어오르기한다. 제가 자판기입니까, 누르면 나옵니까?

이번에도 그림 그리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해서 또 마음을 가다듬고 그렸다. 어 그런데 웬일로 그림이 잘 나온다. 아휴 다행이다. 이번에는 안 망했다. 심지어 재미있다. 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피디님을 쳐다보았다.
피디님은 생각에 잠기더니, "작가님, 작업하시는 걸 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거를 당겨찍고 부감으로 과정을 찍고 저것을 밀고..... 그럼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그려주실 수 있어요?" 켁.

*

촬영 말미에 나의 발연기가 필요한 장면이 있었다. 피디님이 "경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해서 크로마 녹색판을 내 옆에 대고, 나중에 내가 밀어내는 동작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빈 공간에 아이가 나타나서 함께 경계를 밀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럼 이 아이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아이 하나만 그려주시면 부분부분 따서 움직이게 해 볼게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앉아서 그렸다. 뭘 하나만 그려, 다 그려드릴게요. 아이가 들어와서, 폴짝 뛰고,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고, 경계를 미는 동작을 그렸다. 종이에 오일 파스텔 조각을 들고 그리는데, 내 손끝에서 나오는 파도와 그림자 책의 아이가 반가운거다. 오늘 따라 그림이 잘 나오는 거다. 속으로 나는 자판기 맞구나. 누르면 나오는 구나. 이런 농담 곤란한데...생각했다.

폭신한 종이위에 크레용이 부드럽게 적당히 묻는다. 아주 최소한의 선만 긋는다. 순간의 표정과 동작을 잡을 뿐. 이렇게 덜 그려도 애니메이션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그건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내 선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 그림책에만 여백이 많은 게 아니구나. 나는 그림도 이렇게 그리는구나. 독자의 나머지 시선이 선을 이어 여백을 메꾸어 완성된 동작을 만들기를 기대하면서 그리는구나. 그림책은 생각의 여백이 많은 책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독자의 마음을 이끌고 와서는 나머지 공간에서 독자가 완성하게 만든다. 드로잉 선의 끝자락도, 이야기의 끝자락도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 결국 다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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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힌토끼 | 2020/11/15 15:30 | 100일의 글 쓰기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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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조빵 at 2020/11/17 00:27
오우.. 그림 짱. 복 받은 손이십니다~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0/11/17 08:10
허허허허허...(조빵님 너무 댓글을 의무감으로 다는 기분이...)
Commented at 2020/11/18 01: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조빵 at 2020/11/18 01:18
헉 비공개로 하니 제가 무슨 말을 어찌 써놨는지ㅜ 모르겠네요ㅜ비공개는 ㅋㅋㅋ제가 쓴글도 안보인다는 ㅋㅋㅋ완벽한 비공개네요 ㅎㅎ
Commented by 조빵 at 2020/11/18 01:48
공간이 있어야 걔네들이 춤을 추죠! (그럴싸 하지 않나요ㅎㅎㅎㅎㅎㅎ)
뭐 이건 제 생각...또..사장님의 그림이고..
결국 제 그림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제건 춤추는 것 같진 않고 뭐하고 있다고 얘길해야하나.. 쓸데없이 생각만..ㅜ생각만 하다 십년이 훌쩍 ㅋㅋㅋ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0/11/18 08:52
여기 이글루스에 계정이 있어야 비공개로 해도 자기 글이 보여. ㅋㅋ

나는 자기 글 다 보이지롱.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0/11/18 08:53
십 년이 훌쩍 가게 한 자기님의 생각이 궁금하네. 무슨 책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요.
Commented by 개성있는 바다표범 at 2020/11/19 01:46
‘자기님’이요? ^^ '자매님’이 아니고요???
에..이름 불러줘요!! (생각해보면 바캉스사람들은이름을 안 부르는것같아요..)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0/11/19 21:53
유퀴즈 안 보는 구나. 자기님을 모르는구나. 개성있는 바다표범은 또 뭐야. 자기도, 아니 은영씨도 하이델바흐를 좋아하는 건가. 자매님. 딴 소리 하지말고 대답을 해 봐요. 십년 동안 고민하는 책이 어떤거냐고요.
Commented by zo at 2020/11/20 07:55
ㅋㅋㅋ이게 이름이 자동생성이던데요. 이제 아이디 꿨었어요.그리고 울집에 넷플릭스밖에 안나와서ㅜ..딴 소리ㅜ가 아니라. 진짜 아름답고 슬프고 유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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