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the use of a book without pictures or conversations?"said Alice.
by 힌토끼
메모장
그림+책을 만드는 힌토끼의 잡다한 이야기
suzyleebooks.com
카테고리
전체
100일의 글 쓰기
그림책
그림+책
바캉스 프로젝트
함께 만드는 가이드
산+바다
토끼굴 일상사
letters
번쩍
poignant
정답은 없다
작가가 작가에게
산+바다의 책장
나를 만든 책
info
Bloomington
Singapura
놀이
예술교육
전시
흰토끼프레스
미분류
최근 등록된 덧글
와.커피가 꽁짜네요. 역..
by 만토바 at 00:17
ㅎㅎㅎㅎ대화가 소크라테..
by 기차놀이 at 00:08
엇. 이 글을 보고 왜 죄..
by 힌토끼 at 01/25
아앗 귀가 아파. 고만 당겨.
by 힌토끼 at 01/22
놀라게해서 죄송합니다...
by 힌토끼 at 01/22
제가 이탈리아에서 토선..
by 볼로네제 at 01/21
저의 촉이 맞다면...ㅠ..
by 볼로네제 at 01/21
그지. 나도 실은 잘 안 ..
by 힌토끼 at 01/21
피가 되고 살이 되기 전에..
by K at 01/21
ㅎㅎ 재수가 없나보다. ..
by 힌토끼 at 01/21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전블로그
more...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네메시스
75일차_P1_물건들: 계약 1

object: 말 머리

외국 출판사, 특히 미국 출판사와 일하다보면 에이전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처음 외국의 출판시장에 나오면 어리벙벙. 내가 들고 있는 계약서가 표준인지, 나는 제대로 대우받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길이 없으니, 업계의 표준을 가늠하고 내 의심을 해소시켜줄 답안지를 들고 있는 에이전트들이 아쉬운 것이다. 게다가 어떤 에이전트들은 작가가 생각지도 못 한 부분에서 수요를 창출하기도 한다. 베를린에서 만났던 작가 ___는 "내 에이전트가 내 책으로 넥타이를 만들어왔어!"하면서 목을 길게 뺐다.

에이전트가 있으면 계약 뿐 아니라 일의 과정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쉬워지긴 하겠으나..내가 엄청난 양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에이전트 비용 만큼 고생을 더 해보자. 결국은 뭐라도 더 알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항상 새로운 계약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계약서를 대하면 매번, 여전히 매번 눈 앞은 하얗다.

이렇게 저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와 여기저기서 읽었던 것들과 아는 편집자들에게 묻고, 무엇보다 동료 작가에게 염치없이 물어 들은 것들로 얼기설기 계약 조건들을 조정해 나간다. 각자의 과정이 지난한 것을 알기에, 동료 작가들에게 쉽게 묻는 것은 실례다. 조건은 작가마다 다르므로 함부로 묻기 힘들지만, 계약서의 잘 모르는 항목에 대해서는 담당 편집자에게 함부로 묻는다. 특히 영문으로 작성된 계약서는 헷갈리는 것도 많아서, "난 외국인이니 이걸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태도로 정말 자세히 물어보곤 했는데, 그래서 도움이 된 것이 많다. 우선 편집자나 담당자도 계약서의 모든 항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므로 계약서란 것이 절대 권위를 가진다기 보다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이 큰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런 식으로, 막 시작하던 즈음의 정말 형편없는 계약에서 눈꼽만큼 씩 나아져서 여기까지 왔다. 이번 계약의 목표는 지난 계약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이었으니, 나의 계약의 역사는 나의 커리어의 역사다.

계약을 진행하다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토록 낭만적인 책도 어쨌거나 가격표를 단 상품이구나, 아직 존재하지않는 어떤 가능성으로의 컨텐츠를 담보로 가격을 매기고 조율하고 있구나, 내 능력의 가치는 환산하면 이렇구나.. 등등. 이것이 net price인지 retail price인지를 정신차리고 따져보고, 남의 나라 말과의 전쟁, 관례와의 전쟁, 시장의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는 귀차니즘과의 전쟁, 전자책과의 전쟁을 치룬다. 

얼마 전까지도 수요가 미미하므로 전자책은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는데, 바로 그 이유때문에 더욱 계약서 작성이 쉽지않다. 시장의 표준이 없고 드러난 샘플도 없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 전자책으로서의 그림책은 복잡하다. 매체의 특성상, 굳이 같은 돈을 주고 전자책을 보려는 수요는 극히 미미하지만, 미국의 경우, 종이책 출간과 동시에 전자책이 출간되므로 무시할 수도 없다. 출판사는 최대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이 표현을 볼 때 마다 웃음이 나온다-영화 "써니"에서 " 웃기네, 그럼 물도 사먹는 시대가 오겠다!"가 떠오른다) 컨텐츠를 무조건 확보하기 위해 경주하고 있다. 현재 작가로서의 최대선의 방어는 "아직 상상할 수 없으므로 나중에"라는 명목으로 그 시기를 미루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대충 계약서를 이해하고, 나의 입장을 정하고 나면, 출판사와의 밀고 당기기가 시작된다. 나의 요구에 출판사는 언제나 일단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토록 냉정할 수가 없다. 출판사의 입장은 영화 "대부"의 돈 콜레아니의 대사로 요약된다.


사적인 감정은 없어. 이건 사업일 뿐이야.
It's not personal. It's strictly business.


그런데, 작가의 입장도 요약하면 출판사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냉정하게 따져보고, 가열차게 서로의 입장을 내놓고, 박터지게 조율하고, 하나를 얻고 하나를 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수할 것은 고수하고, 전체를 보면서 내려 놓을 것은 내려놓는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계약서만 생각해야한다. 지금 이 계약서는 사인하고 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다. 두고두고 후회하거나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작성해야 한다. 

이 최선을 다 해 작성해야 할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내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된다. (생각보다 계약서를 안 읽는 작가들이 많다) 이해가 안 가는 항목은 꼬치꼬치 물어봐야한다. 언제든지 삭제, 수정, 보완이 가능한 항목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초에 누군가가 작성한 것이고, 그저 표준일 뿐이다. 그리고 딱 이 순간만 바꿀 수 있다. 물론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아예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작가와 출판사가 다 만족하는 계약이란 것은 이상이겠지만, 서로 노력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팀이므로. 우여곡절 끝에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면 뒤돌아서 싹 잊어버릴테니까. 내가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따위를 계산할 깜냥이 못 되는 우리는 결국, 최선을 다할거니까. 실은 출판사와 나의 목표는 같다; 좋은 책을 즐겁게 만들어 많이 팔자.

계약서를 쓸 때는 냉정하게. 사적인 감정은 없으니. 설마 죽은 말 머리를 배달시키지는 않겠지.






.







by 힌토끼 | 2021/01/14 09:39 | 100일의 글 쓰기 | 트랙백 | 덧글(6)
트랙백 주소 : http://tokigool.egloos.com/tb/594484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K at 2021/01/14 11:00
아 깜짝이야. 말대가리는 무섭네요. 그래도 작가님의 가열찬 교육(?잔소리는 아니고..뭐라고 해야할지..) 덕분에 큰 도움이 되고 있씁니다. 적어도 0.6% 정도는 제 밥벌이에 도움이 되고 계세요!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1/01/14 11:56
이야...0.6%면 엄청나다....보람이 느껴진다
Commented by 말전문 작가 at 2021/01/14 15:34
나 저 말대가리 있어요! ㅎㅎㅎㅎㅎㅎ
Commented by 힌토끼 at 2021/01/15 08:39
그래. 뭐 있었던 거 같다-- 안 사도 되겠군 ㅋㅋ
Commented by 치뽈리나 at 2021/01/17 22:51
디자인 계약서는 많이 써 봤어요. 대체로 할인율에서 줄다리기 하거나 컨셉 두개 가격에 세개 해달라고 하죠. 사과 사는 것처럼요. 외국 출판사랑 계약 되면, (김칫국 )남편 찬스 좀 써야 겠어요. 10년 무료 봉사했으니까 당당히 요구하겠슴다!
Commented by 치뽈리나 at 2021/01/17 22:52
이렇게 현실적이고 유용한 글 참 좋아요. 칭찬합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